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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4) <BR>巫世衆- 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 '反 그리고 통·막·살'(2편)무세중씨는 그의 예술적 입장이 쉬르리얼리스트임을 자처하고 있다. 일찌기 쉬르리얼리즘을 무대에서 확인한 사람은 詩人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1917년에 공연된 장 꼭도의 '빠라드'와 아 폴리네르의 타이레시아스의 젖가슴 공연에서 超現實主義 演劇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쉬르리얼리즘 演劇이 처음으로 공연되기 1년 전인 1916년 4월, 취리히에서는 트리 스탄츠아라, 한스 아르프, 리챠드 홀젠벡크 등 세 사람이 詩人, 그리고 畵家들과 超現實主義藝 術運動의 母胎가 되는 dada演劇을 공연한 적이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1918년 츠아라는 그의 유명한 Dada宣言文을 발표하게 된다. 그 宣言文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무세중 연극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Dada는 사회적 계급의 타파이다. Dada는 충돌의 美學이다. Dada 는 未來의 추방이다. Dada는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모든 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이들은 이같이 宣言하고 反藝術,反理性,反思想의 깃발을 내걸었다. 다다이스트들(The Dadaists)은 한스 아르프가 주장한대로 '미쳐버린 時代'의 소산이다. 그래서 藝術家들은 근원적인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으로 '人類의 苦惱를 슬퍼하고 憤怒하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다다이스트들은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로테스크 심볼리즘 (grotesque symbolism)의 美學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앙드레 브루통, 루이 아라공, 필립 스포가 새로운 超現實主義運動을 전개해 나갔다는데 아라공이 한 말은 무세중씨와의 관련에서 중요하다. '우리들은 여러분들에게 친근한 이 매우 편리해야 하고 어리브드의 이 무며 소에 마치 혈암(頁巖) 속에 갇힌 화석마냥 사로잡혀 있다. 서구世界 속에서 여러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리들은 서구의 맞춤들인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포의 대상인 東洋이 우리들의 목소리에 답할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부르타일리스트와 다다이스트들이 하고자 했던 알파한 것이고통 마살에서 실천해 보였다. 반의 빛을 내 건것이 그러했고 쏘의 타부를 타파한 것이 그러했고, 이 時代 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그러했고, 歷史의 비극과 인간의 무력함을 슬퍼하고 분노하며 크로테스크 심볼리즘에 의지하는 일이 그러했으며, 혼란과 불안의 충격적인 조성이 그러했고, 각성의식의 商가 그러했다.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歷史습들이 투철했기 때문이며 社會的反抗性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해 레퍼터리였던 '역사의 후회', '말하는 벙어리', '종이전쟁', '왜 삽니까' 등에서 이같은 特性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무세중씨는 아르또의 해학을 올바르게 수용하고 있다. 그는 肉體言語의 효과적인 創造를 통해 꿈들로 얼룩진 시의 內面的 어둠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아르또의 행은 강렬성을 의 미한다. 그는 동작, 음악, 고함소리, 신음소리, 울음소리, 웃음소리, 음향효과, 그리고 스펙타클 을 통해 드라마의 강렬성을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케 했다. 아르또는 그의 宣言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 고 배우와 관객의 공통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관객들을 참여케 함으로써 관객과 공연사이의 장벽을 철폐한다. 무세중씨는 이번 소회을 통해 드라마를 쓰는 사람과 드라 마를 행하는 사람의 구분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측면의 實驗을 시도했다. 관객 모두가 쌀부대를 뒤집어 쓴다든가, 극장 무대에 들어서면 입구에 누워있는 배우의 몸을 건너가게 한다 든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공존하면서 관객들이 무대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든가, 공연현장을 돌아다니며 본다든가 하는 시도를 통해 관객은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어느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실험해 보였다. '곡의 소리'에서 배우들이 관객들 한 사람 한 사람 면 전에 접근해서 관객들의 손을 잡으며 이들의 슬픔에 동참해 줄것을 종용한다든가, '종이 전쟁'에 서 관객이 종이 인간을 향해 종이 뭉치를 던지면서 야유를 퍼붓게 하고, 종이인간을 찢고, 종이 에 불을 당기도록 하는 일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공연 중간 중간 인터밋션 때 관객들의 合唱을 선도하는 노래도 이 일에 기여하는 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또는 1933년 4월 6일 소르본느에서 演劇 강연을 했을 때 "나는 관객들에게 가혹한 질병 의 체험을 주고 싶다. 그래야만 그들은 공포 속에서 각성하고 깨어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각성 시키고 싶다. 그들은 그들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처럼 완벽하다. 이것이 내가 표현하려는 꿈인 것이다. 나는 탄생의 투쟁을 그리고 싶다." 무세중씨의 작품 '아편', '나는 개가 되고 싶다'는 육체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 체 힘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동물이 된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느정도 병들고 있는 것인가. 이같은 죽음 속에서 탄생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가능한 것 인가 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아르또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비웃고 헐뜯고, 헐뜯고 비웃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해방되어, 정신의 淨化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든 이 공연은 演劇의 이론을 탁월하게 무대에 실천한 공연이 되게 만들었다. 쫓는 그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어떤 해답을 지니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죠셉 체이킨은 말한 적이 있다. 배는 그가 체험한 일에 말없이 의문을 던지면서 무대에 서고, 그가 하는 작업 과정을 통해서 그 자신을 재창조한다. 무세중씨가 이번 공연을 통해서 이룩한 빛나는 성과는 그가 쉬르리얼리즘의 演劇을 시도했다. 거나, 아르또의 殘酷演劇論을 무대에 실천했다는 데에도 있지만, 더욱더 큰 수확은 군대 현대연 극의 理論的 모태가 된 이 두 演劇潮流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과 의 연회 전통을 의식하고 그 표현수단에 크게 의지했다는 데 있다. '한의 소리', '곡의 소리', '통·막· 살 등은 이 점을 명확히 해준 공연이었다. 특히 南北의 장벽이 힐리는 감동적인 순간을 한 통·막 살은 그 祭儀性이나, 空間構成이나, 권인 음악과 소리에 있어서는 소도구 및 대 도구면이나, 동작과 춤에 있어서나, 그리고 액션에 있어서 序幕 부분에서 발휘된 쉬르리얼리즘 과 아르또가 우리의 巫俗과 民俗 속에서 하나로 융화되는 강렬한 무대를 창출해 내었다. 무대 한복판에 흰 광목이 팽팽하게 우뚝 쳐져 南北을 가로막고 있는 '통·막·살' 무대에서 무 세중씨는 거의 알몸이 되어 막걸리 통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황토 진흙과 시래기로 온 몸을 바른 후, 광목벽을 향해 몸을 부딪히고, 머리로 박고,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후비며 몸부림친 다. 광목벽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화가 金丘林씨는 붓으로 그의 몸이 닿는 곳에 색을 칠한다. 무세중씨가 광목벽에서 몸을 때면 그의 몸이 닿았던 흰 광목벽에는 그의 苦惱가 피빛이 되어 찍혀 있다. 이 동작을 여러번 반복하고 난 다음 그가 흰 광목벽을 찢는 순간, 그는 찢어진 틈새에 몸을 걸치고 오열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북으로 건너가 북쪽에 서있는 金丘林씨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운다. 다시 돌아서서 흰 광목벽을 완전히 제거하는 순간 朴倫初씨는 분단의 비극 때문에 희생당한 원혼을 달래는 진혼가를 판소리로 애달프게 부른다. 북소리, 징소리, 배우들의 통곡소리, 관객들의 뜨거운 눈물 속에서 統一을 위한 이 살풀이는 끝난다. 무세중씨는 한 사람의 배우로서 이 나라의 歷史 社會와 그리고 分斷의 비극에 대해서 깊은 의문을 던지며 이 무대에 발을 붙이고 섰다. 그는 무대행위 속에서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어떤 변용이 이룩되었다. 이 변용 속에서 그는 자의 재창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재창조 과정은 무대 전체에 파급되었다. 배우들을 변용시키고, 관객들을 변용시킨 것이다. 그의 '反, 그리고 통·막·살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歷史 속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었고, 죽음의 恨을 달래는 鎮魂曲이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로토흐스키의 명언은 이런 공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俳優는 자기의 全存在를 기증한다. 그것은 '황홀(恍惚)'의 기술이다. 이 때 俳優의 肉體와 本質의 深部에서 일종의 '透視光線'이 분출한다." 우리는 俳優의 빛이 歷史의 빛이 되는 이 무대에서 우리 자신이 무자비하게 폭로되는 공포를 느꼈다. 1982년 이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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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 <BR>"전통과의 충돌"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무세중은 한국의 전위예술가로,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 광산 김씨를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세중 선생의 첫 출판 '무세중과 전위예술'에 담긴 '전위예술'을 연재하기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편집자 주) 어느 젊은 날 여름,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잠결에선가 끄적대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종이 위에 쓴것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렇게 자고 먹고 싸고 살다가 언제 어디서 내가 왜 자고 먹고 사는지 모른채 살고 먹고 싸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치 살고 있는 것이 죽기위한 연습같이 느껴져 몸서리 친적이있다. 나라는 고기덩어리 몸둥아리는 그저 편안한것만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채울것 다 채우고나서 가라 앉으려들고, 마음일랑 속절없이 내팽개쳐 놓을량이면 한없이 달아나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개한 곳으로 날아가 까불어대고....... 생겨나길 내 의지대로가 아니어서 인지 운명, 팔자에 몸을 실어 사랑에 속고 돈에우는 가련한 인생에 목을 매고 자폭 자살하는 삶을 살거냐, 어쩌다 지은 德이 있어 있을것 없을것 다 차려놓고 홍이야 청이야 세월가는 줄 모르고 제속을 파먹어가니 제껍데기에 파묻혀 스스로 숨이 막혀 떠나는거냐. 내가 태어난건 내 뜻대로가 아니드라도 돌아가는 길의 선택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는 길을 道, 그것을 엮고 묶고 펼치고 행하는 것을 劇이라하여 道劇이라고 칭하고 삶을 깨 고 삶을 깨닫고 삶을 깨우치는 분골쇄신의 道劇작업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意識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62년 연극아카데미(드라마센터)에 들어간 이후 1977년 내 개인 창작발표회를 갖기까지 15년간은 자기 발견을 위한 民族本質追求로서의 民俗劇研究와 民藝復興을 제창하여 民衆精神을 모색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傳統을 克服하기 위하여서도 '傳統과의 衝突'를 시도하였고, 새로운 進步 的自我와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再創造라는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에서 나는 자연 서구 '空間과의 衝突'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밤'이라는 어둡고 차고 잔인한 이중인격적인 白人文明社會에서 충격을 받고 그들 幕 위의 際媒와 횡포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돌아와 反이데올로기 · 反테크놀로지 · 反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살풀이'(통·막·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하였고 超現實主義 그림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의 내면 세력으로 유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얼빛(눈빛, 얼굴빛, 몸빛 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등 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새로운 몸짓(손짓, 발짓 등 精氣를 몸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움직임)들을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의 道劇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이 움추려드는 자기의 벽을 깨고, 항상 生存하는 까닭을 깨닫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道劇思想이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 될때는 마치 人道 의 회복에 도극사상의 근본이 있듯이 새로운 민족의 빛, 새로운 민족의 소리, 새로운 민족의 짓을 깨우쳐 나오게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統一과 民主에 이바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테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以小事大 즉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룰때 우리 씨름의 원칙처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가 스스로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이 外勢에 침을 놓고 맥을 끊는(Hit and Run) 충격요법으로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야기로 뒤집어 씌워 눈물을 안고 쓸어지는 리얼리즘이나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번갯불처럼 氣와 氣가 교류되고 以心傳心으로 통하고 그리고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퍼포 밍 아트(Performing Art)의 퍼포먼스(공연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음), 무엇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이야기 없는 상황전개에서 느껴지는 암시와 이해되는 상징. 또한 즉흥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순간적인 눈빛, 몸짓, 목소리의 교합 그리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서 생을 풍요롭게 자극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이후의 창작활동은 내가 봐도 왕성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8년 간의 독일 체류기 간동안 직·간접으로 의식해온 합리주의 사고와 나의 다혈질 정열이 묘하게 어울려 창작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또 정치사회 상황인식에 철저하게 가졌던 나는 내 작품들을 고통, 잔혹의 상황극작품으로 이끌게 된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 쉰셋. 나이 먹으니 헛배도 나오는 몸둥아리로만 추나. 다만 몸을 빌릴뿐인데 머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내 道劇의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다. 내 모든 바램은 이 나라를 수호하시며 나를 지켜주는 단군 산신령 할아버님과 바다를 지키시는 용신령님의 끝없는 배려 하에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1988년 12월 무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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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3)<br>무세중 명인의 무사위 춤사위무(巫)사위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 지역 탈춤을 전수 받고, 탈춤의 기본 동작에 철학적 의미의 '태극'(太極)을 조합시켜 재창작한 춤사위이다. 대학 신입생 20세 무세중은 봉산탈춤(이근성), 양주별산대놀이(김성대), 동래 들놀음(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춤(남형우) 춤사위를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후, 탈춤의 근원을 찾아 또 다시 전국을 누볐다. 1969년 '한국 민속 가면무극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졌다. 이때 발표한 춤사위가 이후 무사위의 근간이 된다. 이후 연극영화과 강의 후 새내기 학생들에게 무사위를 가르쳤다. 민속악회 ‘시나위’ 창립, 민속극회 ‘남사당’ 결성, ‘동아민속예술원’ 창립, ‘극단 민족’ 창립 등 ‘민예부흥운동’의 최 전위에 섰다. 1971년 동아민속 예술원을 설립하고 극단 민족을 창립하여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의 민예 부흥 운동으로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서 왔다.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男舍堂祭)를 기획 연출,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여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무세중은 태생적으로 굿에 열정을 품은 굿쟁이로 태어나 전위 전사의 무당 칼과 창을 들고 민족 분단의 벽을 치고 민족 분열을 용서치 아니하며 민족의 앞을 지키고자 전위(前衛) 행동의 공연을 끊임없이 저질러 왔다.(중략) 또한 무사위(musawee)라는 무세중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춤과 연기 양식의 한극을 만들었으며 그의 춤은 혼을 부르는 춤사위로 영적(靈的) 움직임이 그 좌표가 되며 태극 원리처럼 철학적 상징의 즉흥무로 이어지고 있다."(『무세중의 전위 예술 충돌 50년』서평) 무세중(전위예술가)1937년 서울생. 본명 김세중전위 예술가, 시인, 대동전위극회 대표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명예 이사장 학력서울고등학교,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연극학과 졸업드라마 센터 연극 아카데미 (서울예술대학) 졸업베를린 자유대학 (Freie Universität Berlin) 민족학과 수학경력 1971년 극단 <민족>창단 동아민속예술원 원장 1972년 『한국민속극춤사위연구』(김세중, 동아민속예술원) 1973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연주회 1975 마당극제 노비 문서 전시회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 1977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 1969-1976년 사단법인 민속극회<남사당> 대표1977년 독일 Berlin극단 대표 1982-2020년 통일아리랑 (통상100여 회 발표)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발표 1983년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대진대학교/대학원 연극과 출강(1983-2005)(1987-현재)대동전위극회 대표 2011년 제6회아리랑 상 수상 연출가, 안무가, 통일문화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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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콱 뒈져라. 먹고 싶어 죽겠다. 에라 죽으면 편하지. 너하고는 죽은 인연이야. 너 죽어볼래. 죽어도 못다하는 사랑아.서양 사람들은 위의 모든 죽음의 말들에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인 죽음의 형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죽음의 의미를 갖는 행동 관념을 다 운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죽음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죽음 그 자체로서 생(生)의 반대되는 현상으로 삶으로부터 이잘화시켜 놓는다. 즉 죽음은 삶의 적이며, 공포이며, 부정이며, 파괴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문지방 하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늘 함께하는 친구이며 언제나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계기이며 매일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는 죽음이며 생노병사(生老病死) 중의 하나로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자연순회의 그것처럼 밥 먹듯이 죽음과도 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생사(生死)의 관념은 생(生)과 사(死)의 유기적 관계 속에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통ㆍ피ㆍ살은 '통일을 위한 피의 살풀이'의 줄인 말이다. 귀국 후 첫 작품으로 '통ㆍ막ㆍ살'을 했던 것이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통일에 대한 한 민족인으로서의 몸부림이었다면, 피의 살풀이는 민족 본능에 충동하여 통일을 막으려는 외세와 공포의 핵 공해에 대처하려는 투쟁의 일환으로 죽어있는 통일에 민주의 '곡(哭)'을 바치는 행위이다." (본문 118~119쪽, '통ㆍ피ㆍ살(TongㆍPiㆍSal) 때 : 1987년 8월 3일, 곳 : 바탕골 소극장' 중에서) 이 책에는 1959년부터 2007년까지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평생 예술작업이 담겨있다.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이며 이처럼 한 전위예술가의 50년동안의 전위예술행위가 한 권의 책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오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무세중의 전위예술은 저자의 20대 시절부터 시대에 대한 회의와 대안을 향한 끊임없는 사고의 결과들이다. 따라서 ‘충돌50년’이라는 의미는 저자가 한평생을 바쳐 현실과 역사와 끊임없이 대면하고 저항하고 대안을 찾아 부단히 행위를 해 온 고독하고 힘겨운 예술작업의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한국전위예술을 실제적인 공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저자의 예술적 자세, 공연의 목적과 행위의 이론적 근거들이 일일이 제시되고 있어 전위예술에 대한 실제와 이론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공연을 한 연도와 날짜 출연자와 더불어 사진들을 함께 수록해 명실공히 한국 전위예술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노예술가의 평생예술업적을 기록하고 있다.특히 전위예술은 서구적 예술행위로 인식되어 왔으나 무세중은 이 책에서 전위예술의 전위성이야말로 우리민족 특유의 민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무세중은 이 근거로 우리의 탈춤이나 고대 및 중근대사에서 민중들의 행동방식이나 놀이 등 그리고 민중들이 역사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전위예술술의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무세중은 독일 체류 기간 동안인 1977년부터 1989년 동안의 전위예술 행위를 통해 한국 전위예술의 실험을 무수히 시도하고 유럽에 한국의 탈춤이 갖는 전위성과 한국전통예술과 서구적 행위예술의 접목을 무수히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자의 전위예술의 기본 맥은 전통과 현대이다. 즉 한국의 전통적 미학이 어떻게 하면 세계적 미학과 결합하여 보편적 미학의 세계로 다가가느냐가 저자가 탐색하고 있는 전위예술의 본질이다.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민족성이다. 즉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이 갖는 특징적 요소들이 무세중 전위예술의 근거들이 되며, 저자는 민족성을 민중들의 삶에서 찾고 있다. 민중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낙관적 자세와 역경이 닥칠수록 뭉치는 끈질긴 생명력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한국사의 고대 중근대의 민중들의 삶의 방식과 형태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민중의 생활 속 예술행위들에서 찾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전위예술이라는 이름만 난무하는 한국의 전위예술에 이론적 근거와 한국적 전위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역사적인 전위예술서라고 할 수 있다. 무세중 (지은이) 무세중(巫世衆)의 본명은 김세중(金世中)이다. 상식 밖으로 ‘무(巫)’라는 성으로 바꾼 이유는 김(金)씨 문중의 자손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자손(天孫)’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고, 민족의 근원과 얼이 깃들어 있는 예술의 시원을 찾아 젊은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 8천 리를 걸어서 순례하며 연구하고, 깨달음을 작품 속에 진일보하여 승화시키려 했던 전위 예술가이자 굿 예술가이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연극학 석사를 마치고 독일,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활동해 왔으며 50년간 500여 편의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주로 통일과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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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전위혼, 청년의 것/무세중청년은 앞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싸우는 세대. 그래서 청년은 전위(前衛)이고 전위대는 곧 청년들이다. 승냥이 떼거리가 몰려오고 무지와 독선이 판을 치는 마당이다. 청년이 할 일은 무엇인가 역사와 사회를 인식(認識)하는 일. 인식은 사태를 파악하는 일이요 의식은 그것에 대처하는 행위이다 전위혼(前衛魂)은 청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고통의 예술. 추천인:기찬숙(칼럼니스트) "나는 말한다.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 무세중! 아직도 뜨거운 ‘전사의 피’를 비장(秘藏)한 청년! 민중문화의 저항정신을 행동예술로 표현하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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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 명인의 '문둥북춤'문둥북춤은 경남과 부산지역의 고성오광대 탈춤에서 나오는 탈춤으로 즉흥성이 강조된 춤이다. 문둥이 과장은 야류·오광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과장으로, 수영야류를 제외하고 현전하는 모든 야류·오광대에서 연행된다. 동래야류는 제1과장 문둥이과장, 통영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탈,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 가산오광대는 제3과장 문둥이과장, 진주오광대는 제2과장 오탈놀음으로 연행된다. 고성오광대 제1과장 문둥북춤 과장은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나 조상들의 누적된 죄업으로 인해 천형인 문둥병에 걸려서 고통을 받는 문둥이가 삶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신명을 통해 이를 승화, 극복하는 내용이다. 문둥북춤 과장은 대사 없이 춤으로만 연행되는데, 문둥이는 놀이가 시작되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등장한다.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문둥탈춤은 평생 회복할 수 없는 고름 가득한 상처를 가지고 시련을 견디는 모습을 형상화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경상도에 들어와서 조선인에게 저지른 코베기 전략으로 인해 코가 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민초들의 아픔을 보여주고 그것을 몸굿으로 풀어낸다. 무세중은 봉산탈춤(이근성), 양주별산대놀이(김성대), 동래 들놀음(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춤(남형우) 춤사위를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후 1969년 '한국 민속 가면무극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졌다.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연주회(1973), 마당극제(1975년), 노비 문서 전시회(1975),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1977),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1975)을 공연했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극단을 설립하고 유럽의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탈춤과 실험 연극으로 서방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1982년 잠시 귀국하여 反 이데올로기, 反 테크놀로지, 反 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푸리,(통.막. 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 하였고 초현실주의 그림 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을 표현 하여 이 나라에 신선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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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더스의 손’ 세계적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네번째 인터뷰는 시각예술가 김선미 교수(서경대)이다. 3월 6일부터 19일까지 인사동 마루 아지트갤러리에서는 ‘신의 손’이라는 김선미 교수의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식 기념 및 사진 전시가 진행되었다. 한편 김선미 교수의 연출로 코로나 극복 기원을 하는 이색 이벤트가 인사동 거리에서 열렸다.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주제로 13일 인사동 마루 야외공연장에서 바디페인팅 포퍼먼스가 열려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김선미 아티스트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기미양: 안녕하세요.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과 전시회를 축하합니다. 이번 행사를 마치고 한마디 소감은? 김선미: 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에 미치든, 누군가에게 미치든 평생 하나에 미쳐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행복한 일입니다. 미쳐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좋다면 그건 신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0년 코로나19로 1년 넘게 언텍트시대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지난 작품들을 정리해 이번에 첫 출판을 했습니다. 20여년간 작업한 초창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Q: 통미분장예술연구소(統美扮裝藝術硏究所)는 어떤 목적을 가진 연구소인가요? A: 현재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이 공감하고 저항하는 목소리를 개념미술로 재해석하여 비주얼로 형상화하는 시각예술 연구소입니다. 연구 목적은 '세상을 美로 아우르다'입니다. Q: 통미라는 의미는? A:통미(統美)라는 네이밍은 우리나라 전위예술가 1세대 무세중 선생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움의 큰 줄기는 자연이다. ‘자연의 모든 분야를 아름다운(美) 시각으로 아우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럿을 모아 한 한 판이 되게 하는 아우르다의 사전적 의미를 확장하면 통합(統合)의 개념이 됩니다. 모든 예술장르와 소통하고 美로 아우른다. 그래서 ‘통(統)+미(美)‘라는 뜻에서 ’통미‘라고 명했습니다. Q:선생님이 추구하는 작가정신은 한마디로 무엇인가요? A: 태초에서부터 현생 인류로 연결되는 인간을 생각해 봅니다.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먼 비문명인, 순수했던 인간의 영혼이 담긴 바디를 통해서 신을 닮은 ‘완벽한(Perfect) 아름다움’을 형상화 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의 속성, 반인반신(半神半人)중 신성성(神聖性)을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영적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Q:인간의 몸에 어떻게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인지요? A:인간의 바디, '살아 있는 몸'을 화폭으로 삼아 신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우리에게 신은 바로 자연입니다. 우리의 몸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땅속에서부터 하늘까지 모든 곳에 인간과 함께하는 정령이 존재합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비추어 주는 태양, 바람도 물도 바위. 꽃 한송이 모두 정령입니다. 세상에 모든 곳에는 정령이 있습니다. 작은 조약돌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까지........ 자연계의 수많은 정령들은 우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속에서 사는 고기가 죽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에 바위, 나무, 꽃, 나비, 새. 물고기. 사과, 등을 그립니다. 우리는 오래 전 바다물 속에서 태어난 물고기에서 진화를 했습니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된 생명체라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Q: 이번 첫 출판은 어떤 내용이 정리되어 있나요? A: 1999년 가을 바디페인팅에 美쳐서 다니던 미술대학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한 달 만에 무작정 파리로 떠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듯 20여 년 동안 추구하고자 한 열정들이 분기별로 담겨져 있습니다. 초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이 20여년 동안 시대와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변화한 모습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중간에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균관 대학 박사과정도 수료했습니다. 혼자 바디페인팅을 공부하고 싶거나 수업을 진행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각예술가 입문과정 Q: 국내에서 독보적 존재인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가 되는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A: 한 때는 ‘필받다’ ‘미치다’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난 바디페인팅이 좋아서 필 받는 대로 20년을 미쳐 살다 보니, 미용학원에 바디페인팅 수업이 생겨 가르치게 되었고, 민간자격증과 미용대회가 생겨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는 분야의 전문가로도 살았습니다. 대학원이 생겨나더니 대학이 생기고, ‘교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보다는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었습니다. 때론 바디페인팅 작업을 혼자 하는 것이 어려워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던 때도 있고,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돈을 떠나서 무조건 고고하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에이터의 길은 노력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디란 말 그대로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입니다. 당연히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발끝(발톱 색깔)까지 모두 디자인해야 합니다. 모델에게 입힐 옷을 직접 구상해서 만들고, 어느 때는 특수분장도 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건축물 이상입니다. 숨쉬고 움직이는 건축물,,,,,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헤어와 에어브러시를 가르치면서도 난 여전히 자유로운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Q: 작가의 길을 가면서 어려운 점은? A: 외국은 크리에이티브 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기회도 제공해 주고 확장해갑니다. 세계는 가파르게 변해가는데, 한국은 2016년 '메이크업 국가자격증'이 실시된 이후로 급격히 크리에이티브 한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자격증 교육, 대회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과 작업하려는 동료 작가를 만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Q: 팬데믹 이전 작품전보다 오늘 작품전에서 달라진 점은? 인사동 거리에서 퍼포먼스 작품은 인상적이었습니다. A: 시대에 맞게 작품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팬데믹을 전후해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자연과 합일해야 살 수 있기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각인하기 위해 신화를 소환했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여인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 처럼, 바디페인팅을 통해 자연의 신을 소환했고, 그것이 팬데믹 시대에 문명과 충돌하며 저항하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표현했습니다.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전체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Q: 이번 출판 전시회에서 뮤즈로 분한 모델은 누구인가요? 작품을 쳐다보면 이국적 이미지와 아름다운 눈동자는 잠시 신화 속 이야기로 안내되는 것 같습니다. A: 러시아에서 온 금발 미인 소녀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나의 뮤즈로 활동한지 강산이 한번 변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이 좋아서 정착한 친구입니다. 김선미 작가론 Q: 예술이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A: 예술이란 예측불허라는 자연 앞에 살아가야 하는 약한 인간이 다음 세대의 계승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 저항하며. 신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신을 찬미하는 몸짓에서 기원했습니다. 저의 예술세계는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화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Q: 그래서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목적에 의해 신을 소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 작품에서는 누구나 신의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여자는 여신이 되고 남자는 남신이 되고....어떤 사람은 꽃이 되고, 유니콘이 되고 그렇게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고 싶어 하지요. 선생님 작품은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어느새 우리는 신화 속에서 걷게 됩니다. 전시장을 나와도 그 감동은 오래 오래 갑니다. 그런 신성한 감동은 상처 받았던 자신을 치유시키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신화에서 모티브를 찾게 된 배경은? A: 저의 작품은 신화에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신를 소환하여 인간의 몸에 숨어있는 신의 모습을 찾아서 형상화 하고자 하는 작업이지요. 문명사회를 이루기 전 공동체 사회에서, 신화는 살아있는 역사이었습니다. 자연을 경외하고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시대는 모든 만물에는 정령이 있다고 여기면서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이 있는 시대에서는 마을에서 굶어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노숙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Q: 선생님 작품을 관객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문명의 이기 속에서 점차 빠르게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성 회복을 찾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까요? 큰 범주에서는 인공(Atificial)이 아닌 자연(Natural)을 의미하고, 작은 범주로는 문명에 의해 이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에 저항하는 작업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문명이 정착하기 전 인류 공동체가 공유했던 '아름다운 원시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느껴집니다. A: 모든 문학이나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성 회복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누구나 마지막에는 신을 찾습니다. 누구에게는 어머니가 신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작품속에서 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Q: 21세기에 들어서 인간은 더욱 고독하고, 개인과 개인의 이기적인 관계에서 집단과 집단의 이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욕망이 극대화하면서 자연 파괴의 결과로 코로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출판과 함께 공연한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퍼포먼스 연출 기획의도는 무엇인가요? A:결국 코로나라는 팬데믹도 문명의 이기라는 무기를 가진 인간의 빗나간 욕망으로 예측된 대참사입니다. 자연 파괴는 야생동물에서 가축들까지도 구제역으로 참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는 세계를 멈춘 팬데믹 상황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밝고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화려한 색상을 강조하여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의식을 표출하고자 했습니다. 이정민 무용수의 퍼포먼스, 서승아 무용가의 지신무로 코로나 극복을 간절히 표현했습니다. Q: 분장예술세계에서 김선미 작가는 국내에서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앞장서 가는 전위예술(前衛藝術)의 중심에 선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A: 과한 평가입니다. 저는 그림과 바디페인팅 아트의 세계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미국 가서 특수분장 배우고, 세계경연대회 나가고,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캐나다, 미국, 싱가폴 중국, 몽골, 러시아 등을 다니며 바디페인팅을 하는 동료 아트스트의 작품을 보고 자극을 받고 새로운 작업을 즐기며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Q:가장 영향을 주신 스승은 누구이신가요? A: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십니다. 소개하면 "1937년 5월 23일 서울에서 출생하신 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로서 1950년대부터 대학가의 저항문화였던 탈춤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소개했다. 또 1969년 서울 YWCA 강당에서 공연한 ‘민족극회 남사당 제50회기념공연’은 세간에 묻혀있던 ‘남사당’이라는 민중들의 밑바닥 예술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 선보인 장본인이다. 한국에서의 전위예술 공연은 물론 독일과 미국 체류를 통해 한국 전통예술과 서구 전위예술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등 전위예술 공연만해도 국내외에서 500여 회가 넘는다. 특히 독일에서 발표된 "제3세계 연극論(1977, Munchen 세계 자유 연극제 국제 심포지엄)”은 서구 연극인들에게조차 획기적인 논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세중 선생님은 1982년 독일에서의 귀국 후 첫 공연 작품 "反 그리고 통·막·살 (TongMagSal)”은 남북통일을 주제로 한 대표적 한국 전위예술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의 전위예술의 특징은 그 이론적 틀을 한국의 전통사상과 민중예술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50년 동안의 전위예술작업을 통해 이제 저자는 한국전위예술의 이론과 사상적 배경을 텍스트화 하여 정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시도와 결과들은 그의 생활과 예술행위의 일치성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에서 증명하고 있다. 한국 전위예술의 손꼽히는 춤사위인 ‘무사위’는 선생님의 천지인 사상이 녹아낸 창작물이다." Q:앞으로 작가로서의 행보는? A: 저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예술은 자위행위요. 다 똥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일캠퍼스에서 사람캠퍼스로 바꾸고 '살아있는 예술'(Living Art) 해왔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소통하기 위해 이제 밖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메시지가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 문화예술과 만나서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을 하고 싶습니다. 국악계를 뒤흔든, 세계적 평가를 받은 이날치 밴드와 함께 하는 바디 페인팅 아트같은....... 시각예술은 어떤 예술 장르와도 배합이 자연스럽습니다. 초대합니다. 코로나가 끝나는 날, 마스크를 벗고, 새로운 옷을 입듯, 특별한 메이크업을 하고 지인들과 함께 페스티벌을 즐기던 행복했던 그날들이 다시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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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이 추천하는 휴일의 시 25: 벚꽃 (김영월)요절한 시인의 짧은 생애다 흰빛이 눈부시게 떨린다 살아서 황홀했고 죽어서 깨끗하다 추천인:무세중(전위예술가) "이제 어느 모퉁이 벚꽃나무는 눈부시게 제 멋에 겨워하겠지. 나도 그 적에 그런 세월이 있었단다. 내 너의 그 모습 볼 때마다 ‘나 황홀하게 또 깨끗하겠노라’를 염송했노라. 이제 몇 번이나 더 너를 견줘 염송할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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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 몸굿과 유진규 몸짓이 창조해 낸 '몸빛명인전'오는 30일 한국마임협의회(회장 강지수)는 '몸빛명인전'에서 '무세중의 문둥북춤'과 '유진규의 밤의기행'을 선보인다. 이번 '몸빛명인전'에서 선보이는 무세중의 문둥북춤은 2010년 춘천마임축제에서 선보인 후 10년 만에 다시 대중들과 만난다. 대한민국의 1세대 전위예술가인 무세중과 1세대 마임이스트인 유진규가 30일 오후 3시 대학로 노을소극장에서 만나 25분간의 몸굿과 몸짓을 각각 선보인다. 한국마임협의회는 '몸빛명인전'이라는 공연타이틀을 통해 '무세중의 문둥탈춤'과 '유진규의 밤의기행'을 선보인다고 29일 전했다. '문둥북춤'은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패전에 대한 분풀이로 20여 만 명의 민간인들의 코를 베어 서서히 썩어 들어가며 죽어가게 만드는 아주 잔혹한 광경에서 시작됐다. 이 광격을 목격한 광대들이 훗날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경남과 부산지역의 '오광대탈춤' 첫 마당에 문둥이 과장을 넣어 피해자들의 넋과 애환을 달랬다. 얼굴 손발이 썩어 문드러지는 비참한 상황을 상징하는 '문둥북춤'은 비틀린 손발을 극복하고 앞을 헤쳐 나가려는 '덧뵈기춤'의 광경은 그 기개가 장대하다. 극중 문둥이 얼굴은 우리 백성들의 아픔의 상징이다. 무세중의 '문둥북춤'은 평생 회복할 수 없는 고름같은 상처를 안고 시련을 견디어내거나 혹은 코를 빼앗긴 잔혹한 실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는 민초들의 아픔을 압도적인 한판 몸굿으로 풀어낸다. 태평소 고안나, 바디메이크업 통미가 함께한다.몸굿을 선보이는 전위예술가 무세중씨는 민속극회 남사당의 초대사무총장으로 아리랑민족통일 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어지는 무대는 우리의 몸짓과 한국적인 마임을 고민한 마임이스트 유진규의 '밤의 기행'이다. 유진규의 몸짓은 묻지마 살인이 난무했던 임진왜란 당시의 사회상을 들여다보면서 시대가 만들어낸 폭력과 살인에 대해 고발한다. 한국마임협의회 관계자는 "이번 공연은 코로나19 방역 실천을 위한 '2좌석 띄어 앉기'로 15명만 입장할 수 있다"면서 "단편영화 '봄동'의 채의석감독이 영상으로 담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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